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검의 밤 (문단 편집) == 숙청된 인물 == * [[에른스트 룀]] 돌격대를 이용해 히틀러의 집권을 도왔고 그에 따른 보답을 받기도 했으나 국방장관이 되려는 지나친 행동과 자신의 세력을 믿고 여러 집단을 적으로 돌리는 무리수를 두었다. 결국 숙청 대상자 1순위에 놓여 숙청당했다. * [[쿠르트 폰 슐라이허]] 군 출신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 히틀러 집권 이후에도 주요 보수 정치인 중 한 명으로 히틀러를 견제했고 아직도 군 내부에 어느 정도의 지지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슈트라서가 정말로 여러 보수 세력과 위협을 가해 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였고 결국 6월 30일 결혼한 지 고작 2년밖에 안 된 신혼집에서 아내와 함께 총을 맞고 사망했다. [[똥별]]의 아이콘이며 정치꾼이었기 때문에 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슐라이허의 숙청을 반기는 후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 [[그레고어 슈트라서]] 나치당 초기부터 활동했으며 동생 오토와 함께 당 내 [[좌파]] 노동자 우선주의를 주장했다. 당권과 노선을 놓고 히틀러와 대립하다가 힘을 잃었고 결국 이른바 슈트라서 사태로 인해 나치당이 거의 파멸될 뻔한 원인을 제공했던 인물이다. 이 때문에 희생되었다. 슈트라서가 폭행당하고 고문당하고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을 때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와서 "그 돼지가 아직도 안 죽었나? 그 돼지가 죽도록 가만히 놔둬." 라고 했으며 그것 때문에 슈트라서는 고통스럽게 죽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동생인 [[오토 슈트라서]]는 이전부터 히틀러와 갈라진 채 타국에 망명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목숨을 건졌던 것 같다. * --[[프란츠 폰 파펜]]-- 그나마 파펜은 슐라이허나 자신의 비서들처럼 부부 동반으로 살해당하지는 않았다. 파펜은 전직 총리이자 히틀러 집권에 기여한 업적이 있었고, 무엇보다 힌덴부르크의 신임을 받고 있어서 히틀러가 함부로 제거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마르부르크 연설로 서방 국가의 주목까지 받고 있었기에 섣불리 파펜을 제거했다간 외교 문제로도 번질 수 있었다. 장검의 밤 당일 파펜이 찾아가서 항의하려 했던 바로 그 괴링이 파펜을 보호했다고 한다. 장검의 밤 5주 후에 힌덴부르크가 노환으로 사망한 것을 보면 운은 아직 남아 있었던 셈. 그래도 파펜에게 경고한다는 목적으로 측근들을 쏴 죽이고 몇몇은 개울에 던져 버렸다. 이후 모든 공직에서 사퇴당하고 가택연금되었으며 전쟁 기간에는 [[튀르키예]] 대사로 사실상 쫓겨났다. *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Gustav Ritter von Kahr) [[뮌헨 폭동]] 당시 [[바이에른]] 주지사. 쿠데타 당시 히틀러에게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을 잊지 않고 있었던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피살되었다.[* 다만 다른 두 사람인 로소프와 자이서는 아무 해도 입지 않았다.] 여담으로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루프레히트]]가 그의 반(反) 나치 성향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 에드가르 융(Edgar Jung) 파펜의 측근 중 한 명으로 문제의 마르부르크 대학 연설의 원고를 쓴 사람이었다. 역시 돌격대와 아무 관계 없음에도 파펜을 못 죽이니 꿩 대신 닭이라고 파펜에게 경고한다는 목적으로 죽여 버렸다. * 헤르베르트 폰 보세(Herbert von Bose) 파펜의 공보비서. 역시 꿩 대신 닭이라고 파펜에게 경고하는 차원에서 파펜의 공보비서였던 보세를 죽였다. * 빌헬름 슈미트(Willi Schmid)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경우로, 정치와는 아무 상관없는 평범한 음악 평론가였는데 오인 살해당했다. 원래 나치가 죽이려고 했던 대상은 루트비히 슈미트였다. 루트비히 슈미트는 당시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있었던 [[오토 슈트라서]]의 측근이었다. 오토 슈트라서는 장검의 밤 희생자 중 한 명인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동생이다. 역시 형과 함께 나치당 초기에 히틀러와 대립했다. 형과 달리 오토 슈트라서는 해외로 도피하여 전후까지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는 전후에 민족우월주의를 배제하고 좌파적 이념을 강화한 [[슈트라서주의]]를 주창했다. 해외로 망명해 있던 오토 슈트라서 대신 그 측근인 루트비히 슈미트를 제거하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오류가 생겨서 엉뚱하게도 빌헬름 슈미트가 살해된 것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빌헬름 슈미트의 유가족에게 개인적인 배상을 지불하였다. * [[https://en.wikipedia.org/wiki/Bernhard_Stempfle|베른하르트 슈템플레]] 《[[나의 투쟁]]》 편집에 참여했던 가톨릭 신부였다. 히틀러의 과거와 개인사를 지나치게 자세히 알고 있었고 특히 히틀러의 조카의 석연찮은 죽음의 진상까지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다.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는데 이 숫자가 약 500명이 넘는다는 보고도 있다. [[뮌헨 폭동]] 당시 도와주지 않고 내뺐던 사람들, 그리고 옛날에 돌격대에게 두들겨 맞은 후 히틀러를 고소해서 히틀러가 처음으로 감옥에 가게 만들었던 사람들 역시 살해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